삼각산 화계사
미국에 첫 선원(禪院)을 열다 성향선사
미국스님으로 본명은 바버라 로우즈. 선사님의 초기 손님 중의 한 명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승산 선사의 미국 초기 시정을 같이 보낸 제자 중의 한 명이다.
선사님이 처음 미국에서 선원(禪院)을 연 곳은 로드아일랜드 주 프라비던스의 한 작은 아파트였습니다. 그 아파트는 도일 애비뉴라는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선사님은 아마도 이 거리에서 일어나는 주정꾼들의 싸움 소동이나 칼부림 등 난폭하고 불쾌한 분위기는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선사님이 고려한 것은 비교적 큰 침실이 두 개 있는 집에 150불이라는 아주 적은 월세를 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선사님은 혼자 살림을 꾸려갔습니다. 다른 이들의 도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거미들과 도둑고양이(나중에 애비게일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만이 선사님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모습과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운 대학의 동양종교학 교수가 스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어. 그 교수의 호기심 많은 제자 몇 명이 찾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용기 있는 영혼은 가진 사람들 중에서 한두 명이 자기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 채 선사님과 함께 살기 위해 이사를 왔습니다. 아파트에는 말 그대로 아무런 가구도 없었습니다. 조그마한 식탁 하나와 제 멋대로인 나무의자 몇 개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선사님은 작은 전기밥솥과 사발 몇 개와 숟가락을 샀습니다. 아파트에는 낡은 알루미늄 냄비가 있어 그것으로 놀라울 정도로 맛있는 국을 끓여 먹었습니다.
어느 날 한국에서 불상(佛象)이 담긴 커다란 나무상자가 도착하였습니다. 불상은 적어도 15군데는 부서져 있었습니다. 선사님은 낙담하지 않고 새로 온 제자 중 한 명에게 접착제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꼼꼼하고 끈질기게 수리를 하였습니다.공(空)이 색(色)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시절 선사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직접 행동을 보임으로써 최고의 가르침을 펴 나갔습니다.
영어는 선사님에게 어색하고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영어에 능통하지 못했던 스님은 팬터마임과 본보기 행동의 달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스님의 열정은 우리를 유쾌하게 하였습니다.
초기 6개월 동안 그 아파트를 찾은 이들은 그저 30분만 앉아 있으면 스님이 말씀하시는 목적과 방향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찾아오는 이들이 늘어나자 선사님은 선원을 그 아파트에서 옮기고자 하였습니다. 불단(佛壇)이 중심이 된 더 넓고 깨끗한 법당에 더 많은 이들이 모여 함께 수행하며 자기의 마음을 알 수 있도록 하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스님은 부엌에서 제자들과 웃으며 농담도 하면서 그들이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때때로 스님은 온갖 야채를 다 모아 김치를 담기도 하였습니다. 언젠가는 몇 시간 동안 부엌에 앉아 한국에 있던 이들에게 편지를 쓰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옆에 있던 제자들을 쳐다보며 국수를 먹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대화에 필요한 영어 단어를 알기 위해 스님은 항상 곁에 두고 있던 한영사전을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국수! 누들(noodle) 누들을 먹고 싶나?"
물론, 모두들 활짝 웃으며 스님의 악센트와 열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곧 스님은 부엌을 온통 국수공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 시간도 안되어 지난번 만들었던 국물보다 훨씬 더 나은 국물에 손으로 만든 맛있는 칼국수를 가득 담아 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스님은 자꾸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국수를 먹지. 이것이 최고야! 이걸 먹고 건강해지고 힘을 얻어! 응?"
그러면서 스님은 흐뭇하게 웃곤 하였습니다.
스님은 서서히 전통적인 방식이면서도 스님만의 독특한 선(禪)을 선보였습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새로 고친 불상의 불단에 밝은 빨강과 노란색 천을 두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원의 좌구(坐具)를 여러 가지 밝은 빛깔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가끔씩 한국에서 나무상자가 도착하였습니다. 불단에 놓을 물건이라든가. 회색 승복이나 향 또는 스님이 맛있는 국을 만드는데 필요한쓰는 석이(石珥)버섯 등이 왔습니다.
하루는 선사님이 제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략 일곱 명의 정규적인 '고객'이 있었습니다.(이것은 선사님의 농담인데, 선사님이 만든 국을 먹어 보았거나 일요일 밤의 법문에 참석하는 사람을 선사님은 고객이라고 불렀습니다.) 스님은 우리 선원도 정규적인 시간표를 가질 때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초기 시대가 마감되었습니다.
부엌에서 법당으로 수행 장소가 옮겨졌고 우리는 한국에서 온 잿빛 승복을 입었습니다. 염불문은 영어로 음역(音譯)되었고, 절도 횟수를 정해서 하였습니다. 개인별로 좌구도 할당되었고, 일요일 밤의 법문은 스님의 어학 실력과 비례하여 갈수록 좋아졌습니다. 처음에는 선사님이 일본어로 법문을 하면 브라운 대학교의 동양종교학 교수가 영어로 통역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가 되면서 선사님은 영어 어휘에 대하여 좀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스님이 만든 국처럼 따뜻하고 그득한 영양분의 법문을 영어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이때가 되면서 '손님'들의 수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스님은 영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야 했으므로 너무 바빴습니다. 그래서 부엌일은 공양주를 따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스님이 부엌에 오는 것은 스님이 무얼 쓰거나, 공부를 하거나, 자연발생적인 법문을 할 때뿐이었습니다. 스님은 언제나 어떤 질문에도 기꺼이 응답하였습니다. 가끔 엉뚱한 질문을 하면, 젓가락으로 질문을 한 제자의 머리를 톡 치면서 말했습니다.
"너무 생각이 많아! 내려놔, OK?" 도일 애비뉴에서 보낸 2년 동안 지금의 선원 색깔과 리듬이 만들어졌습니다. 선사님은 자신의 따뜻한 마음으로 이 모든 일을 시작하였고 수행을 인도하였습니다. 스님은 항상 '매일' 쉬지 않고 수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계(戒)를 받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니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가르쳤던 대로, 준비가 된 제자들에게는 오계(五戒)를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스님은 젊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세밀히 살펴보았습니다.
심하게 마음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바른 처방을 내리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형식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봄날에 돋아나는 풀잎처럼 스님은 신선하고 생기 있는 수행과 법에 대한 지혜를 가졌고 이를 다른 이에게 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보여 주었스니다. 어떤 특정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스님은 제자들에게 일일이 따뜻한 가르침을 펴서, 그들이 자기자신을 이해하고 본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끌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