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화계사
모든 것이 선(禪)이다 래리 로젠버그
케임브리지 인사이드 명상센터의 창건자이자, 숭산스님의 초기제자들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선원 창건에도 조력하였다.
나는 선사님을 모시고 5년 동안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서양인 두 명과 함께 한국에서 선사님을 모시고 1년 동안 보냈습니다.
이곳 프라비던스 선원에 오니 링크가 구석구석 안내하여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 가지 감회가 떠오릅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먼저 선사님과 일본에 여행을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선사님이 아주 누렇게 변색되어 버린, 한국식 사찰의 청사진을 꺼내 놓았습니다. 나와 두 명의 서양인이 있었는데, 선사님은 우리 중 한 명인 무불에게 그 청사진을 건네주며, "만약 내가 죽게 되더라도, 꼭 이 절을 지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청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스님이 모든 건물과 각각의 건물 용도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청사진을 치웠습니다, 나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금강선사(金剛禪寺)가 바로 그 청사진에 있던 절과 똑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이런 절을 세울 계획을 일본에 머물던 시절부터, 그리고 이곳 미국에 온 이후에도 항상 간직해 왔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선사님을 아는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듯이, 스님에게는 관용어법이 된 의지적 표현이 있습니다.
"곧 바로 나아갈 뿐"
이 절에 와 보니 스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 매우 기쁩니다.
선사님에 대한 추억들은 언제나 가르침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웃을 것이고 그 이야기들은 재미있겠지만, 결국은 가르침에 관한 것입니다.
선사님과 나, 그리고 다른 세 명이 케임브리지 선원을 개원하였습니다. 몇 달 동안 우리 너댓 명만 살았습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절을 하고 그 밖에 우리가 알던 모든 수행을 다 하였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냥 텅 비어 있던 셈이었습니다. 그저 우리 자신들의 수행을 할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원을 열고 대략 2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하기 위해 찾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때의 일입니다. 그때 우리는 정기적인 월례 수련법회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크리스마스가 임박해오자 나만 제외하고 모두 집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며칠 전에 선사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세요. 아무도 수련법회에 참가신청을 하지 않았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나만 빼고 모두 집에 갑니다. 선사님도 여기 계시지 않을 것이고요. 그러니 법회를 취소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렇지요?" 스님이 말했습니다.
"취소? 왜? 한 명이나 천 명이나 마찬가지! 그냥 법회를 하게!"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나 혼자서 법회를 다 했습니다. 혼자서 절도 하고, 염불도하고, 좌선도 하고, 경행(經行)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론 내가 나에게 독참(獨參)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래리,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가?"
하지만 둘째 날 오후부터는 참으로 좋았습니다. 매우 중요한 그 무엇인가를 배우고 깨달은 느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든 한 명도 오지 않든 우리의 할 바를 다하는 것이지요. 그때의 법회가 내가 하였던 수련법회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수련법회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시리즈로 된 것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처음 한국에 갔을 때, 나는 정말로 산에 가서 참선을 하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그런데 산에 가는 대신에 TV방송국에 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식 수행을 하러 온 첫 서양인이었고, 따라서 참으로 별난 사람들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신문에서도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나는 전직이 교수였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이나, 크고 작은 불교단체, 혹은 비불교 단체 등에 끊임없이 불려가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하루에 대여섯 끼를 대접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성의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인내의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선사님께 투덜거리고, 불평하였습니다.
"언제쯤이면 '진짜 참선'을 할 겁니까? 언제쯤 좌선을 하게 되죠?"
선사님은 한동안 참았습니다. 그렇지만 내 불평은 더욱 직접적이고 적나라해졌습니다.
"이게 뭡니까? 우리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 왔나요?"
심지어 나는 미국에서도 안 입던 정장을 입어야 했습니다. '교수스타일'로 보이도록 말입니다. 스님은 사람들이 모두 내가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참선을 한 일에 대해 궁금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자신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스님은 마침내 나의 불만스러운 태도에 답변을 하였습니다. 사실상 스님은 그날 나를 옴짝달싹할 수 없는 막다른 벽에 떠밀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너는 선(禪)이 단지 앉아서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모든 것이 선이야! 지금 네 일은 교수스타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 주 후에는 산에 갈 것이고, 그러면 그때는 오직 좌선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수 스타일일 때에는 100퍼센트 교수 스타일로! 그리고 산에 들어가면 100퍼센트 좌선하고 경행하고 좌선하고 경행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
미국식으로 비유하자면 이것은 할부금의 첫 달치였습니다. 둘째 달 할부금의 충격은 더 심했습니다.
우리는 음식 때문에 지독하게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음식 때문에 우리들은 병을 앓기도 했습니다. 그 병은 나을 만 하다가 또다시 기승을 부리곤 했는데, 그렇게 되자 무턱대고 한국음식이 싫어졌습니다. 내가 먹어야 할 그 모든 음식들이 단지 미국음식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나는 팬케이크가 먹고 싶었습니다! 한국에는 브랙퍼스트(미국식의 가벼운 아침 식사) 라든가 디저트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브랙퍼스트와 디저트를 너무나 좋아했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불평을 하면서, '햄버거'를 먹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지금 같은 때는 햄버거 세트 하나만 있어도 그것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요리일 거야."
이러한 말들을 선사님은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루는 드디어 따끔한 말씀의 회초리를 뽑아 드셨습니다.
"자네들 지금 어디에 있나?"
"물론, 한국이지요."
"알긴 아는군, 자네들이 한국에 있을 땐, 한국음식을 먹는 거야. 알겠나?"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떄, 나는 미국음식을 먹었지, 내가 그 음식을 좋아해서 먹었다고 생각하나? 나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어! 나도 싫었어! 하지만 미국에 있을 때에는 미국음식을 먹고, 한국에 있을 때에는 한국음식을 먹는 거야!"
그 말이 내 심금을 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