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경인년 하안거 해제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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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계사 작성일17-09-26 09:52 조회8,084회 댓글0건본문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스님
정진(精進)하여 생사(生死)의 명근(命根)을 끊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다겁생(多劫生)에 탁업(濁業)으로 인하여 심성(心性)을 발현(發顯)하기가 보통 일이 아니다. 굳은 의지(意志)와 발심(發心)이 전제됨은 물론 극기(克己)와 자제(自制), 인고(忍苦)의 노력(勞力)이 없이는 고집(苦集)을 깨뜨릴 수가 없다.
화두일념(話頭一念)이 되어 앞생각 뒷생각이 끊어지고, 동(動)과 정(靜)에도 한결 같으며, 잠잘 때나 깨어서나 또한 한결 같아서, 분별망상이 꺼지고 고요하고 맑아서 뚜렷하고 분명할지라도 화두를 놓아서는 안된다. 설사 견처(見處)가 생기더라도 이것으로 화두를 놔서는 더욱 안된다. 이 때야 말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진일보(進一步)하는 큰 용기와 현애살수(懸崖撒手)하는 결단으로 힘써 공부(工夫)해야 된다.
참학자(參學者)들이 정진하다가 조그마한 견처(見處)나 성력처(省力處)가 생기게 되면 공부가 다 된 양 착각하고 아는 소리나 하면서 정진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데, 마치 익지 않은 곡식을 뽑아서 밥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처(用處)가 없을 뿐 아니라 허다히 목전(目前)의 경계(境界)에 휘둘려 주인 노릇을 못하고 세월이 가면 조금 생겼던 정력(定力) 마저도 업력(業力)을 이기지 못하여 마(魔)의 부림을 당하게 되어서 죽음에 이르러서는 아무 힘도 쓸 수가 없게 되는 허망(虛妄)한 처지(處地)가 되는 것이다.
입지여산결정신(立志如山決定信) 입지를 산 같이하여 결정신을 가지고
유여주마갱가편(猶如走馬更加鞭) 마치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하듯 하라
현애살수번신전(懸崖撒手身轉) 벼랑에서 손을 놓듯이 몸을 한번 뒤집으면
통천철지골모한(通天徹地骨毛寒) 하늘과 땅이 사무치도록 모골이 차가우리라.
공부를 하여도 잘 알고 정진해야 된다. 참선(參禪)에 세 가지 사선(邪禪)이 있는데, 첫째가 암중선(暗中禪), 부처님의 경전이나 조사들의 말씀은 다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금옥(金玉) 같은 것인데, 경전이나 조사들의 어록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선지식의 법문도 듣지 아니하면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어떤 장애가 생겼는지 모르기 쉽다. 이렇듯 불경이나 선지식에게 점검하지 아니한 채로 덮어놓고 하는 공부가 암중선이다.
불조(佛祖)의 가르침에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찾아가는 방법(方法)과 증명(證明)해가는 과정(過程)을 우리에게 극명(克明)하게 밝혀 놓았는데도 불조(佛祖)의 말씀을 보고 듣지 않고, 선지식의 탁마도 받지 않은 채 하는 공부가 암중사선(暗中邪禪)이다.
둘째는 문자선(文字禪)인데 이것은 실참실수(實參實修) 하지 않고 그저 불경(佛經)이나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보고 익혀서 불법을 다 아는 양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아는 지식 때문에 오만하기 짝이 없고 사부중(四部衆)을 무시하기도 하는데, 불법은 아는 지식(知識)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수행 정진하여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세지변총(世智辯聰)을 경계하셨다. 실제로 정진은 아니하고 입으로만 털어 버리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선정(禪定) 없는 지식(知識)은 다 허무(虛無)한 것이다.
셋째는 야호선(野狐禪)인데 이것이야말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사람을 속이는 여우 짓인데, 절집 안에 이런 사람 더러 있으니, 정진력도 없는 자들이 다른 이의 대접이나 받고 이양(利養)을 챙기기 위하여 도인행세(道人行世)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을 일러 고인(古人)들은 여우처럼 간교한 자들이며, 풀에나 나무에 붙어사는 도깨비 같고, 지옥의 찌꺼기들이라 했다.
정진(精進)은 진실로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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